김재규는 악인인가, 의인인가?
장호준 목사가 들려주는 아버지 장준하
2013년 04월 29일 (월) 17:31:39 이계선 6285959@hanmail.net
저는 요즘 한국정치사의 어두웠던 단면을 정치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원고를 쓰면서 발견하는 비하인드 스토리에 스스로 놀랍니다. 그중에 민주인사 장준하와 독재청부업자 김재규의 숨은 이야기를 잊을수 없습니다. 그 부분을 아래에 옮겨봤습니다.
알고 보니 장준하선생의 막내아들 장호준목사가 이웃 코네티컷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사상과 문장이 아버지를 그대로 빼어 닮았습니다. 장호준목사를 불러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사상계(思想界)를 읽으면서 지성인의 사회참여를 고민하던 60년대를 추억하면서 말입니다.
한신대를 졸업한 신앙청년 장준하
돌베개를 베고 풍찬노숙을 하면서 만주벌판을 달리던 독립군 장준하
사상계를 펴내어 지성인들의 사회참여를 이끌었던 장준하
긴급조치를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유신독재와 싸우다가 약사봉에서 타살당한 장준하.
그 장준하선생의 이야기를 아들 장호준목사의 입을 통하여 들어보지 않으시렵니까?
5월 16일 오후 7시 뉴욕 플러싱 삼원각(144-20 Northern Bld Flushing NY 11354) 연회장에서 만납시다.
장준하와 김재규의 비하인드 스토리
남한산성에서 김재규 면회를 끝내고 돌아온 안동일은 명동성당으로 함세웅 신부를 찾아갔다. 이태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함세웅은 인권신부였다. 천주교정의평화사제단을 만들어 한국민주화의 선봉을 이끌고 있었다. 함세웅은 재야세력을 이끌고 김재규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신부님, 김재규는 악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안동일 변호사는 그가 만나 본 김재규와 그 부하들의 재판 동정을 털어놨다.
“김재규는 악인이었지만 유신 이후부터는 의인의 길을 걸어온 사람입니다. 10.26은 제2의 안중근 사건이지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저격 살해했습니다. 70년후 1979년 같은 날 10월 26일에 김재규의사는 독재자 박정희를 저격살해 했어요.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하늘의 뜻이지요. 김재규의사는 사실 우리 민주세력들과도 이심전심으로 가까웠지요. 드러내놓고 상대는 안했지만 음으로 양으로 민주세력들을 도와줘 왔어요.”
함세웅은 조심스럽게 숨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김재규는 특히 장준하를 존경했다.
장준하는 국회의원 재직시절 3군단장 김재규 중장을 만난다. 국정감사 야당소속으로 강원도 인제에 있는 3군단을 찾은 것이다. 김재규는 장준하의 서릿발 같은 감사를 받으면서도 존경심이 우러났다. 청렴결백하고 역사의식 민주의식이 뚜렷한 장준하의 인품에 반해버린 것이다.
국정감사를 끝내고 국회의원들이 서울로 돌아가자 김재규는 묘한 작업을 시작한다. 군단장접견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든 것이다. 통로가 묘하고 요상했다. 제갈량이 조조를 사로잡으려고 만든 팔진문(八陣門)처럼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렵게 만들었다.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총총히 박아 놓았는데 들어가는 쪽으로 휘어지게 구부려놓았다. 꼬불꼬불 꽈배기를 이리저리 틀면서 들어간다. 들어가기는 쉽다. 쇠 꼬챙이에 찔려 나오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군단장님 제갈량의 팔진문 비슷하게 만든 이 입구는 어디에 쓰려고 만드셨습니까?”
부하들이 물으면 김재규는 웃었다.
“산 돼지를 잡으려고 만들었어. 산돼지가 날 찾아오면 나가지 못하게 가둬두고 잡아 버리려고 그래”
“산돼지가 들어오려구요?”
“산돼지가 안 들어오면 사람돼지라도 들어오겠지?”
“하하하하 군단장님의 아이디어가 재미있습니다.
“허허허허 정말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야”
훗날 군사재판을 받는 법정에서 김재규는 팔진문의 비밀을 털어놨다.
“나는 3군단장 시절부터 민주화계획을 세웠습니다.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하지 않고는 한국의 민주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이 전방 초도순시차 3군단을 방문하면 그를 접견실에 가두고 협박하여 유신포기를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가 어렵게 입구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재판장이 3군단에 가보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3군단을 방문하기 전에 김재규는 전역을 당한다. 그 바람에 김재규의 팔진문은 용도폐기를 당하고 만다.
그 후로 김재규와 장준하는 지나가다 우연히 스치는 바람처럼 만난다. 만나면 차를 나눴다. 차를 나누면서도 동문서답 같은 이야기로 의중을 전달하곤 했다.
“장선생님이 돌베개를 베고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하신 애국정신을 잘 압니다. 사상계를 펴내어 지식인들을 동원하고 야당의원이 되어 민주화를 이끌어 오신 것도 잘 알지요. 그러나 한번 독재는 영구독재하게 마련이고 타락한 독재는 죽을 때까지 독재하기 마련입니다. 민주화운동으로 군사독재를 끝내기는 불가능하지요. 북한 쿠바 동독을 보세요. 독재자는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정권을 내놓지 않습니다.”
“김장군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러나 난 군대가 있기에 한국 민주주의에 소망이 있다고 봅니다. 군인이라고 모두 독재를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요. 조지와싱톤 미국대통령은 장군출신이지만 3선 추대를 거부한 민주주의자였어요. 한국의 장군들 중에 독재 좋아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거개가 민주주의를 지지할 것입니다. 군대가 있기에 한국 민주화는 소망이 있어요. 군대가 아니면 한국 민주화는 영영 불가능 하다고 봅니다.”
(?.....)
장준하의 군대소망론에 김재규는 할 말을 잃었다. 아마 그때 어렴풋이 10.26의 씨앗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장준하는 측근에게 이런 말을 했다.
“1975년이 오면 재야와 야당 전체를 아우르고 군부 일부가 동조하는 어떤 거사를 계획하는 모의가 생겨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 보건대 모종의 그 결사모임은 8월 20일경이 될 듯싶소.”
그런데 8월 20일을 3일 앞둔 8월 17일 장준하는 약사봉에서 추락하여 죽는다.
3일을 앞두고 죽는다. 아! 약속한 8월 20일을 3일 앞두고 죽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독재정부는 얼른 추락사로 발표했다. 37년이 지난 2012년 정부는 장준하의 죽음을 타살로 발표했다.
“장준하는 누군가에 의해 머리 뒷부분을 둔기로 강하게 얻어맞고 바위 아래로 던져져 죽었습니다.”
누가 죽였을까? 장준하는 유신철폐민주회복운동의 선봉장이었다. 장준하 뒤에는 정보부가 24시간 밀착감시를 하고 있었다. 당시 두 개의 정보부가 있었다.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와 차지철의 청와대경호실 정보팀이었다. 누가 장준하를 죽였을까? 정보부는 알 것이다. 정보부도 모른다고 잡아뗀다면 그건 정보부가 죽였을 것이다. 김재규의 정보부가 아닌 다른 정보부가.
장준하의 죽음이후 김재규는 박선호를 시켜 은밀히 가족들을 돌봐준다. 어느 때는 돈봉투가, 어느 때는 쌀가마가 밤을 타고 날라 왔다. 경찰도 귀신도 모르게 벌리는 도깨비작전이었다. 그러나 장준하의 유가족들은 어렴프시 짐작하고 있었다. 한해가 지난1976년 말 이었다. 김재규정보부장은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을 남산정보부로 불렀다.
“너무 서러워 말게나. 부친의 사망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네. 그리고 아버지의 소원도 반드시 이뤄질 것이고”
10·26이 일어나기 3개월 전 김재규는 또 장호권을 불렀다.
“자네는 당분간 미국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내가 여권과 수속을 마련해 주겠네. 이유는 묻지 말고 3개월 안으로 어서 한국을 떠나가게”
김재규의 목소리에는 자식을 아끼는 부성애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장호권은 출애급하는 심정으로 서둘러 이민길을 떠났다. 미국으로 간 장호권은 3개월 후에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10.26이 일어난 것이다.
‘아하! 아버지 장준하의 계획에 포함되었던 군내 동조 세력은 김재규장군 이었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분은 몰래 우리 집을 도와주셨다. 10·26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민주의거인 것 같다. 김재규장군은 아버지를 형제처럼 생각하는 분이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의거를 3개월 앞두고 나를 살리려고 미국으로 보내주셨구나!
장호준 목사가 들려주는 아버지 장준하
2013년 04월 29일 (월) 17:31:39 이계선 6285959@hanmail.net
저는 요즘 한국정치사의 어두웠던 단면을 정치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원고를 쓰면서 발견하는 비하인드 스토리에 스스로 놀랍니다. 그중에 민주인사 장준하와 독재청부업자 김재규의 숨은 이야기를 잊을수 없습니다. 그 부분을 아래에 옮겨봤습니다.
알고 보니 장준하선생의 막내아들 장호준목사가 이웃 코네티컷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사상과 문장이 아버지를 그대로 빼어 닮았습니다. 장호준목사를 불러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사상계(思想界)를 읽으면서 지성인의 사회참여를 고민하던 60년대를 추억하면서 말입니다.
한신대를 졸업한 신앙청년 장준하
돌베개를 베고 풍찬노숙을 하면서 만주벌판을 달리던 독립군 장준하
사상계를 펴내어 지성인들의 사회참여를 이끌었던 장준하
긴급조치를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유신독재와 싸우다가 약사봉에서 타살당한 장준하.
그 장준하선생의 이야기를 아들 장호준목사의 입을 통하여 들어보지 않으시렵니까?
5월 16일 오후 7시 뉴욕 플러싱 삼원각(144-20 Northern Bld Flushing NY 11354) 연회장에서 만납시다.
장준하와 김재규의 비하인드 스토리
남한산성에서 김재규 면회를 끝내고 돌아온 안동일은 명동성당으로 함세웅 신부를 찾아갔다. 이태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함세웅은 인권신부였다. 천주교정의평화사제단을 만들어 한국민주화의 선봉을 이끌고 있었다. 함세웅은 재야세력을 이끌고 김재규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신부님, 김재규는 악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안동일 변호사는 그가 만나 본 김재규와 그 부하들의 재판 동정을 털어놨다.
“김재규는 악인이었지만 유신 이후부터는 의인의 길을 걸어온 사람입니다. 10.26은 제2의 안중근 사건이지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저격 살해했습니다. 70년후 1979년 같은 날 10월 26일에 김재규의사는 독재자 박정희를 저격살해 했어요.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하늘의 뜻이지요. 김재규의사는 사실 우리 민주세력들과도 이심전심으로 가까웠지요. 드러내놓고 상대는 안했지만 음으로 양으로 민주세력들을 도와줘 왔어요.”
함세웅은 조심스럽게 숨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김재규는 특히 장준하를 존경했다.
장준하는 국회의원 재직시절 3군단장 김재규 중장을 만난다. 국정감사 야당소속으로 강원도 인제에 있는 3군단을 찾은 것이다. 김재규는 장준하의 서릿발 같은 감사를 받으면서도 존경심이 우러났다. 청렴결백하고 역사의식 민주의식이 뚜렷한 장준하의 인품에 반해버린 것이다.
국정감사를 끝내고 국회의원들이 서울로 돌아가자 김재규는 묘한 작업을 시작한다. 군단장접견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든 것이다. 통로가 묘하고 요상했다. 제갈량이 조조를 사로잡으려고 만든 팔진문(八陣門)처럼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렵게 만들었다.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총총히 박아 놓았는데 들어가는 쪽으로 휘어지게 구부려놓았다. 꼬불꼬불 꽈배기를 이리저리 틀면서 들어간다. 들어가기는 쉽다. 쇠 꼬챙이에 찔려 나오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군단장님 제갈량의 팔진문 비슷하게 만든 이 입구는 어디에 쓰려고 만드셨습니까?”
부하들이 물으면 김재규는 웃었다.
“산 돼지를 잡으려고 만들었어. 산돼지가 날 찾아오면 나가지 못하게 가둬두고 잡아 버리려고 그래”
“산돼지가 들어오려구요?”
“산돼지가 안 들어오면 사람돼지라도 들어오겠지?”
“하하하하 군단장님의 아이디어가 재미있습니다.
“허허허허 정말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야”
훗날 군사재판을 받는 법정에서 김재규는 팔진문의 비밀을 털어놨다.
“나는 3군단장 시절부터 민주화계획을 세웠습니다.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하지 않고는 한국의 민주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이 전방 초도순시차 3군단을 방문하면 그를 접견실에 가두고 협박하여 유신포기를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가 어렵게 입구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재판장이 3군단에 가보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3군단을 방문하기 전에 김재규는 전역을 당한다. 그 바람에 김재규의 팔진문은 용도폐기를 당하고 만다.
그 후로 김재규와 장준하는 지나가다 우연히 스치는 바람처럼 만난다. 만나면 차를 나눴다. 차를 나누면서도 동문서답 같은 이야기로 의중을 전달하곤 했다.
“장선생님이 돌베개를 베고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하신 애국정신을 잘 압니다. 사상계를 펴내어 지식인들을 동원하고 야당의원이 되어 민주화를 이끌어 오신 것도 잘 알지요. 그러나 한번 독재는 영구독재하게 마련이고 타락한 독재는 죽을 때까지 독재하기 마련입니다. 민주화운동으로 군사독재를 끝내기는 불가능하지요. 북한 쿠바 동독을 보세요. 독재자는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정권을 내놓지 않습니다.”
“김장군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러나 난 군대가 있기에 한국 민주주의에 소망이 있다고 봅니다. 군인이라고 모두 독재를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요. 조지와싱톤 미국대통령은 장군출신이지만 3선 추대를 거부한 민주주의자였어요. 한국의 장군들 중에 독재 좋아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거개가 민주주의를 지지할 것입니다. 군대가 있기에 한국 민주화는 소망이 있어요. 군대가 아니면 한국 민주화는 영영 불가능 하다고 봅니다.”
(?.....)
장준하의 군대소망론에 김재규는 할 말을 잃었다. 아마 그때 어렴풋이 10.26의 씨앗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장준하는 측근에게 이런 말을 했다.
“1975년이 오면 재야와 야당 전체를 아우르고 군부 일부가 동조하는 어떤 거사를 계획하는 모의가 생겨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 보건대 모종의 그 결사모임은 8월 20일경이 될 듯싶소.”
그런데 8월 20일을 3일 앞둔 8월 17일 장준하는 약사봉에서 추락하여 죽는다.
3일을 앞두고 죽는다. 아! 약속한 8월 20일을 3일 앞두고 죽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독재정부는 얼른 추락사로 발표했다. 37년이 지난 2012년 정부는 장준하의 죽음을 타살로 발표했다.
“장준하는 누군가에 의해 머리 뒷부분을 둔기로 강하게 얻어맞고 바위 아래로 던져져 죽었습니다.”
누가 죽였을까? 장준하는 유신철폐민주회복운동의 선봉장이었다. 장준하 뒤에는 정보부가 24시간 밀착감시를 하고 있었다. 당시 두 개의 정보부가 있었다.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와 차지철의 청와대경호실 정보팀이었다. 누가 장준하를 죽였을까? 정보부는 알 것이다. 정보부도 모른다고 잡아뗀다면 그건 정보부가 죽였을 것이다. 김재규의 정보부가 아닌 다른 정보부가.
장준하의 죽음이후 김재규는 박선호를 시켜 은밀히 가족들을 돌봐준다. 어느 때는 돈봉투가, 어느 때는 쌀가마가 밤을 타고 날라 왔다. 경찰도 귀신도 모르게 벌리는 도깨비작전이었다. 그러나 장준하의 유가족들은 어렴프시 짐작하고 있었다. 한해가 지난1976년 말 이었다. 김재규정보부장은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을 남산정보부로 불렀다.
“너무 서러워 말게나. 부친의 사망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네. 그리고 아버지의 소원도 반드시 이뤄질 것이고”
10·26이 일어나기 3개월 전 김재규는 또 장호권을 불렀다.
“자네는 당분간 미국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내가 여권과 수속을 마련해 주겠네. 이유는 묻지 말고 3개월 안으로 어서 한국을 떠나가게”
김재규의 목소리에는 자식을 아끼는 부성애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장호권은 출애급하는 심정으로 서둘러 이민길을 떠났다. 미국으로 간 장호권은 3개월 후에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10.26이 일어난 것이다.
‘아하! 아버지 장준하의 계획에 포함되었던 군내 동조 세력은 김재규장군 이었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분은 몰래 우리 집을 도와주셨다. 10·26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민주의거인 것 같다. 김재규장군은 아버지를 형제처럼 생각하는 분이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의거를 3개월 앞두고 나를 살리려고 미국으로 보내주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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