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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성준] SBS 8 뉴스의 김성준 앵커가 쓴 글, `여자 얼굴`

음바페여친 2014. 11. 9. 18:22

 




2006년 워싱턴 특파원 시절 쓴 글입니다.



일요일 한나절을 뭘 하며 보낼까 고민하다 지난 주가 세계 여성 주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인터넷 검색에 들어갔습니다. 

Women’s week & Washington 같은 검색어로 서핑을 하다 보니 National Museum of Women in the Arts가 나왔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국립 여성 미술인 박물관’쯤 되겠지요. 

남자 미대생 하면 독특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제 낡은 사고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박물관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술관 입구에 들어선 뒤 ‘이런 곳이 필요한 절실한 이유가 있었구나’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미술관이 만들어졌겠나 싶을 만큼 여성에 대한 세계 미술계의 장벽이 높고 험했던 것입니다. 

예컨데 현대 미국 화가인 리 크라스너 같은 경우는 자신의 작품을 화단에 추천하는 스승의 화평이 이랬다고 소개합니다. 

“작가의 성별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미술관에 전시된 어느 작품을 골라도 여자로 태어나 빗 대신 붓을 들었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감수해야 했던 작가의 고단한 운명이 녹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성 작가들의 그림만 전시해 놓은 미술관을 난생 처음 둘러보고 나니 뭔가 좀 다른 게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이 남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그게 뭘까 하면서 몇몇 전시장을 다시 돌아보다가 문득 발견한 작품이 바로 메리 커셋의 ‘목욕’이란 그림입니다. 

아이를 안고 목욕시키는 엄마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미국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극히 동양적인 화풍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아이 목욕을 시키는 엄마의 얼굴이 이제까지 많은 그림에서 봐 왔던 여자의 얼굴과는 너무나 달랐다는 점이었습니다.



곱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쁘다거나 매력적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하지만 엄마의 얼굴로는 그야말로 완벽한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그 동안 흔히 봐왔던 남자 작가들의 그림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여성성이 보였습니다.



여자에 대한 묘사라면 심지어 기독교 성화의 막달라 마리아에게조차 에로티시즘을 삼가지 않는 ‘남자 그림’에 익숙해져 있다

처음으로 여자가 그린 여자의 모습을 마주하니 미술관을 도는 내내 뭔가 어색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지요.





‘참 여자답긴 한데 연인 보다는 엄마나 누이에 대한 어린 시절 추억에 더 가까운’ 여자들. 

전시된 작품들 속에 숨은 이 일관된 분위기에 놀라면서 미술관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돌뿌리 걸리듯 확 튀어 보이는 여성의 초상화가 있어서 작가의 이름을 들여다 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의 제수인 여성 화가 모리조의 초상을 그린 ‘남성 작가’ 마네의 그림이었습니다.

갸름한 얼굴, 도톰한 입술, 분홍빛 볼… 

흔히 보던 여자의 모습이었지만 이 박물관 안에서는 마치 자유로운 복장을 한 여학생으로 가득 찬 교실에 교복 입은 한 명이 멀뚱 멀뚱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리조를 그린 그림은 생뚱 맞았지만 모리조가 그린 그림들은 미술관의 흐름과 잘 조화하고 있었습니다. 

모리조의 갤러리에는 남편과 딸아이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 있었는데 설명을 읽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서양 미술사를 통틀어서 부성 (父性)이나 부녀 (父女)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것이라더군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알게 모르게 미술의 소재까지 반쪽으로 제한하는 폭거를 자행해 왔던 셈이지요. 


 




역사를 통틀어 그림 속의 여자는 자신의 본성이나 역할과는 무관하게 항상 성적 쾌락에 적합한 얼굴과 몸매를 강요 받았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딸과 한가롭게 노는 것 같은 장면을 ‘남성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터부시 한 것 또한 남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사고의 감옥이었습니다. 

사회가 가진 편견이 인간의 생각에 얼마나 큰 장막을 드리우는지 깜짝 놀란 마음을 안고 미술관을 나왔습니다. 

그 동안 눈에 쓰고 있었던 두꺼운 색안경 하나를 벗어 던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시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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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신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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