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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생업 포기하고 구조에 발벗고 나서는 진도 주민들..

음바페여친 2014. 4. 26. 22:2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34&aid=0002630955


[앵커]


불과 다섯 가구가 살던 전남 진도 팽목항은 지금 실종자 가족과 자원봉사자 등 만여 명이 오로지 생존 소식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환 기자가 팽목항의 하루를 취재했습니다.

[기자]

전남 진도의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 팽목항.

상가 대여섯 곳만이 자리잡았던 작은 항구였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수백개 새하얀 천막 사이로 실종자 가족과 자원봉사자, 경찰 등 만여 명이 각자의 일을 위해 분주한 모습입니다.

항구 대기실은 해양경찰의 상황실로 바뀌었습니다.

일부 상가는 문을 닫았고, 그나마 문을 연 상가 옥상은 전 세계에서 온 취재진이 자리잡았습니다.

[인터뷰:김중현, 팽목항 상인]

"처음이죠. 진도에 사람들이, 취재진이 많이 온 건 처음입니다. 우리 집에는 지금 외신기자가 와서 묵고 있어요."

항구 주변 쉰 가구 정도가 사는 팽목 마을은 모든 것이 멈췄습니다.

4~5월 팽목마을은 농사를 짓거나 미역을 말리는 등 한창 바쁠 시기.

하지만 이곳 주민 역시 지금은 생업을 중단했습니다. 

자신들의 작업공간은 실종자 가족과 구조당국, 언론사 차량의 주차공간으로 내줬습니다.

실종자 구조 작업이 길어지면서 팽목항 주변 30개 도서 지역 주민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접안시설이 막히면서 팽목항과 섬을 오가는 이동선은 노선이 절반 이상 줄었습니다.


[인터뷰:이재종, 서진도농협 조도지점장]

"운항하는 배 선편이 3개 회사에 8회 정도 됩니다. 그런데 화물부두에 썰물이 되면 접안이 불가능해서 3회로 줄이고 있어요."

하지만 기다리는 생존 소식만 들린다면 이런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터뷰:김현주, 서거차도 주민]

"배들도 왔다 갔다 하고 밤에 헬기도 다니고 조명탄도 쏘고 하니까 특히 어민이나 섬에 사는 분들은 바다라는 곳을 잘 아니까 더욱 맘이 아프죠."

방문객이 수십 명에 불과했던 남해의 작은 항, 오늘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 실종자 구조라는 한가닥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진 1. 팽목항에서 바라 본 진도 앞바다>


사고 8일째인 23일, 팽목항에서 바라 본 진도 앞바다는 평온해보였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한 어머니가 바다를 향해 목놓아 울고 있었다. 실종자 수가 희생자 수로 바뀌어가는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보며 실종자 가족들을 곁에서 지켜보던 자원봉사자와 진도 군민들의 마음도 함께 타들어갔다.

<사진 2. 팽목항 배 운항 시간표: 사고 이후 하루 3차례로 줄었다.>


조도행 운항 횟수 줄어…슬픔 '함께'

진도군은 본도인 진도를 비롯해 231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사고수습본부가 위치한 팽목항에서는 배를 타고 인근 조도로 들어갈 수 있다. 진도 팽목항에서 인근 조도까지는 하루 8차례씩 훼리가 드나들곤 했다. 하지만, 사고 직후 운항 횟수는 3차례로 줄었다. 선착장에 있던 매표소 자리가 임시로 옮겨지면서 차량 수송과 발권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진도농협에서 운영하는 조도고속훼리에서 매표업무를 담당하는 32살 박철오 씨는 배 운항 횟수가 줄면서 조도 주민들의 생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모두 안타까운 심정으로 슬픔을 함께 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 씨는 "정부의 늑장 대응에 어른으로서 화가 난다"며 "잃어버리는 실종자 없이 희생자 시신이라도 부디 모두 찾을 수 있길 바란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사진 3. 서망항에서 일하는 어민들>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바로 진도 어민들이다.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어선들만 모두 백 여척. 그 가운데는 진도를 기반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어민들이 상당수였다.


<사진 4. '천수호' 선장 곽종태 씨>

"당시 심정 말하면 뭘합니까? 마음만 아프지."

최근 꽃게잡이가 한창인 진도에서는 어획한 꽃게를 실어나르는 어획물 운반선이 서망항으로 바쁘게 드나들고 있다. 어획물 운반선 '천수호'도 세월호 침몰 당시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갔던 어선 가운데 하나다. "사고 소식을 듣고 25분만에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배는 이미 70도 정도 기울어진 상태였어요. 학생 2명이 구명조끼를 입은 채 난간에 겨우 버티고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천수호 선장 64살 곽종태 씨는 세월호 침몰 사고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천수호 도착 이후 30분이 지나자 인근 어선 40여척이 조업하던 그물을 즉시 잘라내고 달려와 작은 어선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일분일초가 급박한 순간이었다.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하고 배 안에 수백 명의 탑승자들이 남아있단 소식을 듣고 참담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당시 심정이요? 말을 하면 뭘 합니까? 마음만 아픕니다."

<사진 5. 자료사진: 팽목항에서 자원봉사자들>

가장 먼저 달려온 진도 주민들

더운 날씨 속에도 팽목항에는 팔을 걷어붙이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구호품을 나르는 손길이 분주하다. 실종자 가족 지원을 위해 진도 곳곳에서 달려온 지역주민과 자원봉사자들로 그 수만 100여명. 이 가운데 진도 주민들은 가장 먼저 천막을 설치하고 먹을 것을 실어날랐다. 52살 주일기 씨는 건설업 일을 위해 조도면으로 자주 드나들었지만, 사고 이후 자재가 들어가지 못해 일을 중단하게 됐다며 이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주 씨는 세월호 침몰 보도만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처음에 전원 구조됐다 믿었는데 사태가 너무 커졌습니다. 도저히 볼 수가 없고, 차마 말이 안나옵니다."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주 씨는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한 달 동안은 일터에 못 들어가죠. 그 한 달 동안 도울 수 있다면 도울 겁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자신의 일처럼 현장을 지키고 있는 진도 주민들, 마지막 실종자를 찾을 때까지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킬 사람들도 바로 이들이다.

하선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6&aid=0010023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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