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사에서 일하는 30대 초반의 주부는 며칠 전 저녁 9시경 퇴근했다. 놀이방에서 20개월 된 아이를 찾아와 등에 업고 수퍼마켓에 들렀다. 퇴근한 남편과 이곳에서 합류했다. 장을 본 뒤 집에 들어오니 9시 반. 땅으로 꺼질 것처럼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저녁은 간단히 모밀국수로 때우기로 했다. 그런데 국수를 삶고 무즙을 만들고 양념을 준비하니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 평소 ‘나 몰라라’ 하던 남편도 이날은 미안했는지 아이를 대신 재우겠다고 했다. 하지만 설거지를 하고 간단히 정리를 하고 나니 자정녘이 됐다.
그는 “남편에게 불만은 없지만 이렇게 주부의 희생이 클 줄 알았다면 40살 넘어 결혼했을 것”이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두 시간만이라도 집안일에서 해방돼 책을 읽는 게 그의 꿈이다. 그는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순간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질 때가 있다”고 한다.
우선 음식부터가 서양 음식에 비해 주부의 일손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주부들은 “하루 세 끼를 제대로 차려먹으려면 밥 해먹고 치우는 일만으로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고 한다. 흔히 우리나라 음식은 정성이라고 하지만 먹는 입장은 좋지 하는사람은 고생이다.
스파게티 같은 서양 음식은 차리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짧고 먹은 뒤 치우는 것도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반면 한국 음식은 준비 과정도 까다롭고 품이 많이 든다. 잡채를 예로 들자면 우선 시금치를 일일이 다듬어 흐르는 물에 씻은 뒤 데치고 별도의 양념을 해놓아야 한다. 버섯, 달걀 지단, 양파, 목이버섯, 고기는 각각 따로 볶거나 준비한다. 당면은 찬물에 불려뒀다가 물에 끓인 뒤, 간장과 설탕, 깨소금으로 버무려 볶는다. 준비해 놓은 갖은 야채들을 넣고 버무린다. 이렇게 품이 많이 들지만 결국 식탁에 올려지는 건 한 접시다. 시래기 국을 만들려고 해도 시래기를 산 뒤 잘못 말리면 곰팡이가 생기니까 데친 다음에 말리는 등 보통 손이 가는 게 아니다. 어릴적 소풍가는 날이면 어머니가 김밥 만든다고 새벽녘부터 일어나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한국의 음식을 보면 신선도에 비해 식품의 보관이 오래가지 않는 단점이 있다. 저정식품을 제외하고 신선한 야채를 만들 때 나물의 경우 데쳐야 하고 마늘, 파, 참기름, 소금, 깨 그리고 고추가루등 각종 양념의 사용이 많이 필요하다. 보관도 쉽지 않아 한나절이면 쉽게 쉬어 버리기 일쑤여서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기 곤란하다. 양식의 경우와 같이 몇가지 간단한 기본요리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야근도 하고 회식도 하지만 아침 식사만큼은 꼭 차린다는 30대 주부는 오전 7시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식초, 참기름, 깨소금, 마늘, 파를 다지고 뿌려서 양념간장을 만드는 데에만 5분 가까이 들어요. 아주 간단한 걸 준비해도 최소 20~30분은 걸리죠.”
한식은 상차림을 할 때 필요한 그릇 수도 많다. 요즘은 식기 세척기를 많이 쓰지만 접시와 달리 오목한 그릇들을 일일이 다 세척기에 넣을 수도 없다. 집안 청소도 우리나라에선 좀더 손이 많이 간다. 진공청소기를 쓰는 입식문화 중심의 서양과 달리 우리는 좌식 문화라서 마루나 방 바닥을 물걸레질 해야 한다. 한 주부는 “요즘 스팀청소기를 쓰는 덕분에 과거보다 편해지긴 했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직접 손걸레질을 해야 할 때가 많다”고 했다. 빨래도 세탁기가 대신 해준다고 하지만 아직도 가족의 속옷이나 걸레 등은 직접 삶는 주부가 많다.
원 없이 자녀의 매니저 역할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엄마의 경우는 차라리 낫다. 일하는 엄마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마음만 졸이기도 한다. 밤 11시까지 직장에서 야근하다가 자녀가 공부하는 도서관으로 가서 차를 대놓고 기다리다가 집으로 실어나르는 엄마도 한둘이 아니다. 집 밖에서 일한다고 집안일에서 면죄부를 얻지도 못 한다. 맞벌이 부부가 나란히 퇴근하면 남편은 쉬고 아내는 그때부터 집안일을 하는 게 현실이다.
내가 혼자 해도 쉽지 않은 가사와 육아 일을 다른 사람의 눈치까지 봐가며 해야 한다면 몇 배 더 고통스러워진다. 요즘은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던 과거와는 달리 시어머니가 오히려 신세대 며느리의 눈치를 보는 세상이다. 하지만 시어머니 때문에 가사노동이 힘겨워진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주부도 많다. 고부간의 갈등이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그치지 않고 일거리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40대 초반의 한 직장인 여성은 일요일 오후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평일에만 집에 와서 아이들을 돌봐주는 시어머니가 월요일 아침에 오기 때문이다. 주말 동안 어질러 놓은 집안 청소를 하느라 피자나 자장면을 배달해 먹은 표시를 없애느라 정신이 없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밥을 안 해주면 눈치가 보여요. 주말 지나고 시어머니가 오시면 ‘아이고, 반찬이 하나도 안 줄었네. 불쌍한 우리 손주들, 만날 인스턴트만 먹어서 어쩌나’ 하시거든요.” 평일에 아이들을 봐주는 시어머니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워진다. 그러니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귀찮아도 밥을 꼬박꼬박 차려먹는다. 시어머니 때문에 노동량이 늘어나는 것이다.
시부모로 인해 계획했던 스케줄이 어그러지는 경우는 다반사다. 모처럼 맞은 주말에 쉬려고 하면 갑자기 “김장 담그러 오라” “오늘 대청소를 하자”고 한다는 것이다.
설날과 추석, 집안의 제삿날은 물론 신정에도 시부모들은 자녀가 집에 오길 바란다. 30대 초반의 한 주부는 “지방에 떨어져 사는 것도 아니고 같은 서울에 살면서 왜 명절이면 모여서 자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딱히 할 일이 없는 12월 31일에도 모두 모여서 멍하니 TV를 보면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집안에서 일하는 주부이건, 집 밖에서 일하는 주부이건 명절은 이들에게 ‘노동절’이다. 명절이 다가오기 전부터 마음과 몸이 동시에 아프다는 주부도 한두 명이 아니다. 명절음식 또한 손길이 너무 많이간다. 신세대 주부들은 “무엇이든 일을 안 하고 있으면 바늘방석에 앉은 듯 괴롭다” “하루 종일 여자는 음식을 대령하고 남자는 받아먹는 가족 문화가 너무 화가 난다”고 한다.
평소에 아내의 일을 돕던 남편도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선 시치미를 떼고 나 몰라라 한다. 한 주부는 “시댁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친정에 가도 엄마가 속상해 하실까 봐 ‘난 막내 며느리라고 일도 안 시키더라’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몸에 좋다는 유기농 제품이나 웰빙 제품이 인기라고 하면 이런 걸 일일이 해먹지 못하는 맞벌이 주부들은 주눅이 들게 된다. 그렇다고 멸치 같은 천연 재료를 말리고 빻아서 만든 천연 조미료를 챙겨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서울 강남의 한 주부는 “옆집 엄마가 ‘돈가스 소스를 직접 만들어 먹인다’고 하면 그냥 듣고 흘리려고 해도 ‘나는 무얼 하고 사나’ 싶어진다”고 했다. 학교 급식과 관련해 대형사고라도 터지면 주부의 한숨 소리만 커간다.
물론 인스턴트 식품으로 간단히 식사하고 외식을 즐기는 가정도 늘고 있다. 하지만 ˝집에서 먹는 ‘집 밥’에 대한 신화˝는 여전히 주부에게 부담을 안겨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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