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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정희의 치졸한 뒷공작 시리즈 - 김대중 납치살해사건 (사건경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 주의)

음바페여친 2014. 6. 12. 00:58

 

박정희의 치졸한 뒷공작 시리즈 - 김대중 납치살해사건



김대중 납치살해사건이란 무엇이냐. 

아시는분들은 다 아시겠죠? 그러나 혹시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게시물을 올리긔.

요즘 하루하루 박근혜때문에 빡치는 나날들이 계속됨으로 저는 계속 공부를 하게 되고...

언젠가는 내가 꼭 글을 올리리라고 다짐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살해사건을 오늘 올리기로 했긔.




유신 정권 시절.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해외에서 납치살해하려고 시도했던 사건.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양일동(통일당 당수), 국회의원 김경인과 함께 담화를 나누고 자유민주당 기무라 의원과의 약속장소로 출타하던 김대중이

한국인으로 보이는 괴한 5명에게 납치를 당했긔. 

범행 현장에는 배낭, 휴지, 노끈, 마취제 등의 유류품이 남아있었긔.

아래의 자료를 보면 이 납치사건은 단순히 그냥 납치가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긔.














괴한들은 오사카 또는 고베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 가량을 달려 바닷가로 향하긔.

그곳에서 김대중을 모터보트에 태워 30~40분을 항해하고 

정박해있던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공작선 536톤 용금호에 인계하긔.

용금호에 있던자들은 김대중을 배 밑쪽 선실로 끌고 가서 손발을 다시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겹을 붙이고 그 위에 다시 붕대를 감았긔.

그리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kg짜리 돌을 매달고 등에 판자를 대고 몸과 함께 묶었긔.

(이때 이들은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바다에 후카(상어)가 많던데.", "솜이불을 씌어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 등의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하긔.)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항해하던 중, 김대중은 눈이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굉음을 느꼈고 

선실에 있던 그들은 "비행기다!"하면서 뛰쳐나갔긔.

배와 비행기가 서로 쫓고 쫓기를 30분 이상이 되었긔. 

그것이알고싶다에서는 이 비행기의 정체를 미국 CIA의 연락을 받은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이었다고 주장했다고 하긔.

그리고 당시 CIA서울지부장이던 도널드 그레그가 김대중 납치소식을 듣고 

직접 중정에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긔.




어쨌든 이런 추격전 끝에 김대중은 부산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해 앰뷸런스로 이송되고 수면제로 인해 잠이 들었긔. 깨고 난 뒤에는 2층 양옥이었고 다시 차에 태워진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나게 되긔. 납치된지 129시간만인 8월 13일 저녁 10시 30분경이었긔.



납치사건 이후 인터뷰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이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 및 수장 사건의 경위긔.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박정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정부 개입설을 전면 부정했긔.

일본 경찰이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 관련자들의 출두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해버리고 이때문에 일본내에서는 주권 침해에 대한 비난여론이 대두되고 

한일 정기각료회의 연기나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이 취소 되는 등 한일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긔.


결국 미국의 배후 영향력행사와 한일간의 절충 끝에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전 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등에 합의하여 사건 발생 86일만에 

한일관계를 정상화 되면서 끝나게 되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정치자금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소문이 있긔. 

실제로 1975년 3월 25일 미국무성 전한국부장 도널드 래너드는 박정희가

대한항공 사장 조중훈과 국제흥업 사주 오사노를 통해 일본 다나카 수상에게 

3억엔을 뇌물로 바쳐 사건에 대한 인멸공작에 성공했다며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의 비밀청문회에서 밝혔긔.



결국 이렇게 주권침해, 중정 관련설, 범인 출두 등은 사건의 진상과 함께 영원히 미궁속으로 빠지게 됐긔.



11월 2일 김종필이 진사방문하여 

"이번 김대중 사건이 발생한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로서 각하와 일본 국민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한다.

한국 정부는 두번 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박정희의 친서를 일본 수상에게 전달하고 

이는 경술국치일 이래 한국정부가 일본에 진사하는 치욕스러운 일이 되긔.



한편으로는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이 수사 은폐하려는 의혹이 일었긔.

사건 직후 박정희에 의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지만 아무런 성과없이

1년 후인 1974년 8월 14일 내사중지했으며 다시 1년 후인 1975년 7월 21일 내사종결, 그대로 묻혀버렸긔.

그리고 수사본부가 작성한 당시 수사자료를 보면 엄청난 범위를 수사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정착 찾은 증거는 전무하다고 하긔.

당시 수사본부 부본부장이었던 전 마포경찰서장 이흥세씨는 

실제로 수사본부가 한 수사는 서류조사밖에 없었다고 증언했긔.




이렇게 사건은 조용히 사라지는듯 했지만 

훗날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중정부장이었던 이후락은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을 살해할 의도는 전혀 없고 단순한 납치일 뿐이며 비행기의 실체도 부인했긔.

하지만 당시 용금호의 조리장인 조시환씨는 1994년 민주당 당사에서 양심선언을 하면서 비행기가 분명히 있었다고 했긔.

또한 이후락의 인터뷰와 달리 호텔에서 발견된 유류품들은 

당초 김대중을 호텔방에서 살해, 사체를 토막내고 피를 욕실 배수구로 흘려 보낸 뒤, 

토막난 사체를 배낭에 담아 바닷 속에 버리려는 목적이었음을 증명했긔. 

또한 용금호에서 범인들이 한 행동과 말들을 종합해봤을때 김대중을 수장시킬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긔.




자, 이제 여기서 슬슬 박정희의 발빼기가 시작되긔.

박정희는 1974년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을 만났을때 자신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며 

중정의 소행이라고 말했고 책임을 물어 이후락을 중정부장에서 해임했긔.

김종필은 1980년 3월 12일 아사히신문 논설주간에서 이후락이 납치계획을 세우고 미국 CIA에 통보했다고 말했긔.

박정희와 김종필은 발을 빼고 이후락에게 덮어씌우려고 한거긔.

그러나 이후락의 주장은 달랐긔.

이후락은 1980년 전 국회의원 최영근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고 밝혔긔.

그러다가 갑자기 얼마 후에 박정희는 이 사건에 대해 관계가 없다고 말을 바꾸긔.


현재 이 사건의 당사자인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락이 모두 사망하여 납치를 지시한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는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게 됐긔.

하지만 당시의 총리께서는 아직 살아계시긔.

(그러나 공공연한 사실로는 박정희의 암묵적 지시에 의해 이후락이 이철희를 통해 지시하고 

김기완 주일 공사- 김동운 1등 서기관 – 한국의 제임스 본드라 불리던 윤진원등이 사건을 실제 주도한 핵심인물이죠.)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다룬 일본 영화 KT가 있는데 이 영화를 보면 세가지를 알 수가 있긔.

첫째, 박정희가 지시했다. 

둘째, 납치가 아닌 살해작전이었다. 

셋째, 일본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영화를 보면 자위대 출신 정보요원들이 이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했다고 나와있긔.

중정요원들의 갈등과 고뇌가 드러나는 영화라 사람에 따라 거부감이 들 수 있긔.

(그리고 여기에는 김갑수가 나오는데 참고로 김대중 전 대통령 역은 아니긔.)




밀리언 자료 리서치라는 회사는 중앙정보부의 요청을 받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적을 파악했다고 하긔.

이 회사 대표인 쓰보야마는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위대 정보분서에서 일하다 주일 한국 대사관 김동운 1등 서기관을 소개받아 이 일에 개입하게 됐다고 털어놨다고 하긔.

김동운 일등 서기관은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납치사건에 가담한 인물이긔.


쓰보야마대표는 자위대를 그만둔 뒤 김대중 소재파악 팀장 역할을 하며 거주지 확인, 활동자금원조사, 한민통등 일본 지원조직 동향등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긔.

김동운은 신문기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쓰보야마씨에게 김대중 소재파악부탁을 했던것으로 밝혀졌긔.

쓰보야마는 납치 직전 김대중 전대통령 소재파악에 성공했고 결정적으로 중정의 납치 살해공작의 도화선이 된거긔.


김동운은 납치사건 바로 직후인 1973년 8월 중순[김대중 전 대통령은 8월 13일 서울 도착]에 사토라는 가명으로 쓰보야마씨에게 입단속을 시도했다고 하긔.


그러나 일본 자위대 출신의 사설탐정회사외에도 이미 중앙정보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적을 상세히 파악했었긔.

바로 중앙정보부 협조자가 있었기 때문이고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은 그 협조자가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야당활동을 한 야당의 거물정치인이라는 사실이긔.


아래는 김대중 납치살해기도사건의 중정 비밀문건자료긔.













첨부 자료에도 드러나듯이 중정이 양00 이라는 사람을 조종해 귀국토록한다고 돼 있긔.

당시 납치현장에는 야당 당수를 지낸 양 모와 김대중 전대통령의 친척인 야당의원 김모씨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긔.

지금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면하셨지만 납치 살해사건도 반드시 진상규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긔.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아는걸 박근혜만 열을 올리며며 북한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긔. 나도 박근혜때문에 열이 오르긔.

글이 많이 산만하긔.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 막 작성한거라 나중에 다시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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